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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in Art]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김창열 화백 이야기

2022년 10월 14일 오전 09:00
■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앵커]
작고 동글동글한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오늘 '사이언스 in Art'에서는 물방울 화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박수경 디렉터와 함께 합니다. 어서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물방울 그림과 김창열 화백! 여기저기서 참 많이 듣기는 하는데, 오늘 제대로 한번 알아봐야겠네요. 먼저, 김창열 화백, 어떤 분인지 소개를 좀 해주시죠.

[인터뷰]
네, 캔버스 위에 영롱한 물방울이 그려진 작품이 바로 김창열 화백의 대표작품이죠. 그래서 김창열 화백을 '물방울 화가'라고 부릅니다.

1929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창열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서예를 접하면서 자연스레 붓글씨와 회화를 가까이하게 되는데요. 후에 외삼촌으로부터 데생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합니다. 특히 16살의 나이에 이쾌대의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하는데요. 참고로 이쾌대는 근대 미술에서도 사실주의 미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이후에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아쉽게도 김창열 화백이 2학년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요. 경찰직에 임하게 되는데, 끊임없이 습작하면서 붓을 놓지 않습니다. 경찰직을 그만두고 미술 교사로 일하다가, 1957년에 현대 미술가협회를 결성하게 되는데요. 이때 이 협회에 또 다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죠, 박서보 화백에게 가입을 권유하고요. 현대전이라는 전시에서 함께하며 흔히 우리나라의 '앵포르멜'이라고 불리는 미술 사조 흐름을 이끌어갑니다.

[앵커]
김창열 화백이 또 다른 유명 작가 박서보 화백과도 연이 있었네요. 또 다른 예술가들과도 연이 있었을까요?

[인터뷰]
네, 박서보 화백과도 절친했고요. 또 대학 시절의 은사가 바로 김환기 화백이었는데요. 김환기 화백의 제안으로 영국 런던에 한국 대표 작가로 나가서 활동하기도 하고요. 뉴욕에 머물면서 아트스튜던츠리그에 들어가서 판화를 공부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또 백남준을 만나게 되는데요. 백남준과 함께 1969년에 아방가르드 축제에 함께하기도 합니다.

이 축제 이후에는 파리에서 자리 잡게 되는데요. 파리에서는 같은 협회 동료였던 박서보 화백의 도움으로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때 이우환 화백도 만나서 교류하게 되고요.

[앵커]
박서복,김환기,백남준 이우환까지 우리가 충분히 알만한 이름이 마구 쏟아지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인터뷰]
네, 김창열 화백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물방울'을 무려 50여 년간 그렸죠. 먼저 김창열 화백이 뉴욕에 머물다가 파리에 정착했다고 앞서 이야기했는데요, 이때 파리 외곽의 팔레조라는 곳에 작업실과 거주 공간을 두게 됩니다. 이곳에서 '마틴 질롱'이라는 여성을 만나서 함께 사는데요, 이 시기가 김창열 화백이 금전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어렵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업할 때 들어가는 재료들을 아껴쓰고, 재활용해서 작업했다고 하는데요. 특히 이미 사용한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서, 캔버스의 뒷면에 물을 적셔서 물감을 떼어낸 후에 다시 사용했는데요. 이때 캔버스 위에 얹혀져 있는 물방울에 햇빛이 비춘 그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후에 계속해서 이 물방울을 소재로 삼게 됩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 김창열 화백은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내 그림 중 하나를 뒤집어 놓았는데, 물을 부었더니 셀 수 없는 물방울이 맺혔고 빛이 나면서 그림이 되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 어떤 신의 계시 같은 느낌도 드는데요. 김창열 화백은 1972년에, 파리에서 개최된 살롱 전시에서 공식적으로 물방울 작업을 대중에게 선보였고요. 이듬해인 73년에는 이 물방울 작업만을 모은 첫 개인전을 프랑스에서 선보이면서 본격적으로 '물방울 화가'로서의 인지도를 쌓기 시작합니다.

[앵커]
보통 작가들이 보통 그림을 그릴 때 메시지를 담고 있잖아요.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작업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인터뷰]
김창열 화백은 파리에서의 전시에 이어서 1976년 국내에서 개최한 개인전에서도 물방울 작업을 공개해 화제가 됐었죠. 김창열 화백이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기 물방울 회화에서의 물방울은,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정화와 치유의 수단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경험한 전쟁에 대한 공포나 허망한 감정, 또 월남한 후에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여러 감정을 느꼈을 텐데요.

특히 김창열 화백은 이 전쟁의 상처에 대해서 '6.25 전쟁의 상처는 너무나 깊다.' '스무살'이라는 젊은 나이의 나는 마치 맹수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괴로웠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심적으로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김창열 화백에게 '물방울'은, 단순히 영롱하고 아름다운 소재를 넘어 작업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자신의 내적 고통을 순화하고 치유하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5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 소재를 통해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줄 수 있던 것 같습니다.

[앵커]
50여 년이 넘게 이 한가지 '물방울'이라는 소재에 집중했다는 것이 참 경이롭게 느껴지는데요. 그렇다면 작품을 표현한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 왔나요?

[인터뷰]
물방울 회화 작업을 시기적으로 간단하게 훑어본다면, 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전시를 통해 공개한 이후에 1980년대에 캔버스가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하는데요. 바로 ‘마대자루’의 그 '마대'입니다. 마대는 재질이 거친 특징이 있는데요. 이 거친 표면 위에 물방울을 묘사하면서 마띠에르, 즉 그림의 질감을 살리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요, 제가 초반에 김창열 화백이 어린 시절에 서예와 붓글씨를 가까이했다고 이야기했었는데요. 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마대 위에 물방울뿐만 아니라 한자를 그리기도 하고, 색을 다루기도 하면서 '해체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화폭에 물방울과 한자가 함께 올려지면서 한층 더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담게 됩니다.

80년대 후반에는, 한자와 물방울을 함께 그리는 작업이 심화 되어서, 대표적인 연작으로 잘 알려진 ‘회귀’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그려집니다. 김창열 화백은 이 회귀 시리즈를 통해서 실제로 동양의 철학이 지닌 사상과 영감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앵커]
이렇게 열심히 연구하고 작업하던 김창열 화백의 타계 소식을 최근에 들었던 것 같은데요.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셨죠. 미술계에도 여파가 컸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인터뷰]
네, 맞습니다. 김창열 화백은 2021년이죠. 작년 1월에 92세의 나이로 별세하게 됩니다. 워낙 국내와 프랑스, 또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작가이기도 하고요, 특히 프랑스와 한국, 양국의 문화교류 측면에서 김창열 화백이 크게 이바지 한 부분을 인정받아서 1996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인 슈발리에도 수상했죠. 2013년에는 우리나라의 은관문화훈장, 2017년에는 또다시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공로훈장인 '오피시에'를 수상하게 됩니다.

이런 세계적인 작가의 별세로 당시 국내외 미술계에서는 영향이 있었고요. 미술 시장의 측면으로 봤을 때는요, 미술품 같은 경우는 희소가치가 아주 중요한 메리트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별세할 경우 작품의 가격이 치솟는 현상이 있기도 합니다.

바로 김창열 화백이 작고했을 시기에 국내 경매 시장에서 김 화백의 작품들이 그야말로 낙찰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요. 이때가 또 국내 미술 시장이 부흥하기 시작하던 시기라, 여러 가지가 맞물려서 당시 김창열 화백의 작품가는 많이 올랐습니다.

[앵커]
국내외 미술계의 큰 영향을 준 김창열 화백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는데, 미술계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김창열 화백을 만나볼 수 있다고요?

[인터뷰]
네, 김창열 화백의 둘째 아들인 김오안 감독과 브리지트 부이오 감독이 함께 만든 영화인데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입니다. 이 작품은 아들인 김오안 감독이, 아버지인 김창열 화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김오안 감독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유독 과묵하고 말이 없던 김창열 화백이 한때는 어려웠다고 이야기합니다.

프랑스에서 자랐는데, 소통이 활발한 여느 프랑스 가정과는 달리 김창열 화백은 거의 침묵을 지켰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아들로서는 아버지의 삶이 더 궁금했고,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김창열 화백의 내면과 작업에 대해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김오안 감독은 김창열 화백이 스스로 달마대사와 동일시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요. 김창열 화백이 50여 년간 물방울을 그리는 과정이 일종의 수행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앵커]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궁금해져서 꼭 한 번 봐야 될 것 같은데요, 국내에서는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인터뷰]
있습니다. 바로 제주도 한림에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인데요. 2016년에 저지 문화예술인마을에 설립됐고요, 김창열 화백이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서 자신의 주요 작품 중 약 220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건축물 또한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도 잘 어우러지는데요, 특히 홍재승 건축가, 김창열 화백이 생전에 인생과 작품으로 추구했던 철학을 건축물로 구현하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이 미술관은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자로 ‘돌아올 회’ 자를 나타내고 있는데요, 김창열 화백의 작품 ‘회귀’ 연작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앵커]
우연한 계기로 물방울을 그리게 됐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물방울에 담아온 김창열 화백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제주도 가면 미술관도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 했습니다.고맙습니다.

YTN 사이언스 김기봉 (kgb@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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