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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in Art] 꿈속에서 본 풍경…안견의 '몽유도원도' 따라가 보기

2023년 08월 18일 오전 09:00
■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앵커]
화가 안견과 몽유도원도라는 그림 제목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당시 화단에서 큰 화제가 된 작품이죠. 오늘 '사이언스 in Art'에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합니다. 어서 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오늘 알아볼 화가 안견이 조선 초기 여러 왕대에 걸쳐 작품 활동을 했다고요?

[인터뷰]
네, 맞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눌 인물은 바로 '안견'인데요. 안견은 세종 때 무척 활발하게 활동하고, 이후 문종과 단종을 지나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쭉 활동했습니다. 특히 시문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안평대군을 섬기면서 가깝게 교류하기도 했는데요.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담은 '몽유도원도'를 그리면서 당시 조선의 화단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앵커]
안견이 미술 교과서에서도 나오고 드라마도 종종 나왔던 것으로 아는데요. 안견에 대한 소개 부탁 드립니다.

[인터뷰]
안견은 조선 초기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활동했는데, 이 시대 때 안견의 화풍을 뒤따르던 화가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재능이 뛰어났고, 조선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요. 산수화를 유독 잘 그렸고 그 외에도 초상화와 더불어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네 가지 식물을 일컫는 매난국죽을 그리는 사군자에도 뛰어났습니다.

안견의 이런 화풍은 널리 퍼져 일본까지도 전해졌는데요.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안견의 생애에 대해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는데요, 도화원에서 높은 직책까지 올랐던 것으로 보아 재능이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이고요. 세종의 총애도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안견은 궁중 의전 절차 등을 기록하는 대소가의 장도라는 기록화를 그리게 했다고 하고요.

특히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몽유도원도를 그리면서 조선 화단을 사로잡아서 후에 신사임당 등이 안견의 화풍을 따랐습니다.

[앵커]
안견이 세종 시대 때 크게 활약했다고 하는데, 세종 시대 때는 회화를 그냥 그림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서요?

[인터뷰]
네, 우리가 조선 시대의 회화를 살펴보려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누가 통치했는가? 등을 참고해서 보는 게 좋은데요. 왜냐하면, 당시 화원이 속해있던 도화원이라는 곳이 나라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궁중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의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의 배경을 함께 보는 게 좋습니다.

안견이 가장 활발하게 활약했던 세종 때에는 회화 자체를 정치와 연결해서 보는 관점이 있었는데요. 이를 위해서 세종은 화원의 수를 2배 늘리는 등 도화원을 더 활성화 시키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백성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도록 하고, 백성들이 선왕의 얼굴을 볼 일이 드물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라고 하기도 했거든요. 그러면서 특히 안견이라는 인물과 그가 가진 재능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4품이라는 높은 관직을 주기도 했습니다.

[앵커]
안견이 안평대군과 각별했다고 알고 있는데, 안평대군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인터뷰]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었고, 둘째 형인 수양대군에 의해서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죠. 시문, 그림, 가야금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고요. 학문에도 뛰어났는데, 당대 명필로 꼽힐 정도로 글씨도 굉장히 유려하게 잘 썼다고 합니다. 안평대군은 집현전의 학자들과도 어울리면서 토론을 하곤 했는데요. 세종은 안평대군의 이런 모습을 높이 사서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을 지닌 '비해당'이라는 호를 내려주기도 합니다. 이에 감격한 안평대군은 안견에게 기념으로 자신의 초상을 그리게 하기도 하거든요. 이처럼 학문의 관심이 많은 세종을 닮아 시를 나누기도 하고, 깊게 교류했습니다.

[앵커]
안평대군과 안견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면서요?

[인터뷰]
네,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의, 지금으로 치면 '아트컬렉터'였거든요. 조선 전기 예술을 아낌없이 후원했던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중국화를 중심으로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안견의 산수화도 30여 점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견 또한 안평대군이 가지고 있던 중국화 들을 보고 이런저런 화풍들을 익히기도 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안평대군은 안견을 후원하고, 안견은 이런 안평대군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고 명작들을 그려내기도 한 겁니다.

[앵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그린 몽유도원도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안평대군이 직접 쓴 몽유도원도 발문도 있다고요.

[인터뷰]
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렸다는 '몽유도원도'가 바로 안견의 수작으로 손꼽히죠. 이 그림 한 점으로 당대 조선 화원들의 존경과 시샘을 동시에 받았다고 알려졌는데요. 복사꽃이 만개한 무릉도원에서 문신이었던 박팽년과 함께 여가 시간을 보내는 내용이 담겨진 작품입니다. 여기에서 무릉도원은 복숭아꽃이 흐드러지는 환상적인 장소를 의미했는데요. 중국의 천재 시인이었던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에 나오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당시 혼란했던 사회에서 이 무릉도원은 동양 사상에서 이상적인 공간의 대명사가 됐는데요. 몽유도원도 그림이 완성된 후에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정묘년 4월 20일 밤에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득하여 깊은 잠에 빠지고 꿈도 꾸었다. 박팽년과 어느 숲에 당도하자 층층의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깊은 골짜기가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중략) 그러다 노인을 만났는데 '이 길을 따라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라고 일러주었다"

[인터뷰]
안평대군의 발문에 따르면 안견이 이 몽유도원도를 3일 만에 그렸다고 하고요. 이 발문에는 안평대군뿐만 아니라 당대 덕망 높은 다른 선비들의 찬문도 함께 수록되어있습니다.

[앵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신선을 만나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이 몽유도원도는 다른 그림과 달리, 특별히 보는 방법이 있다고요?

[인터뷰]
네, 사실 작품을 자유롭게 보는 것도 좋지만, 작가가 의도한 구성대로 따라가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 몽유도원도는 일반적인 두루마리 형식의 그림과 달리 왼쪽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도원이 펼쳐지는 구성인데요.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려졌습니다. 작품을 보시면 화면의 좌측이 현실 세계고, 우측으로 갈수록 꿈속의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데요. 안견은 이 현실과 이상을 시각적으로도 서로 다르게 묘사했습니다.

왼쪽은 평평하고 일차원적으로 묘사됐는데요. 오른쪽과 비교해보시면 왼쪽의 묘사가 확실히 좀 단조롭게 표현됐죠. 오른쪽의 이상 세계로 갈수록 산의 굴곡이나 형태가 좀 더 복잡해지고 얼기설기 율동감이 있게 그려졌거든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왜곡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또, 왼쪽의 산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라면 오른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관점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이런 점을 참고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앵커]
이 몽유도원도를 실제로 보고 싶은데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인터뷰]
아쉽게도 몽유도원도 원본은 국내에 있지 않고요. 현재 일본 덴리 대학 부속 덴리 도서관에 보관되어있습니다. 대신 국내에서 몽유도원도의 모사본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 있는데요. 부암동의 무계원 이라는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계원의 부지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던 공간과 흡사하다고 전해지는 '무계정사' 터인데요. 소실되었던 무계정사지를 2014년에 복원하면서 전통문화공간으로 만든 곳이 무계원입니다.

이곳에 안견의 몽유도원도 모사본이 상설 전시되고 있고요. 발문에 찬문을 남긴 신숙주, 정인지, 박연, 박팽년 등의 인물들도 소개되어있습니다. 전통이 깃들어있는 고즈넉한 장소에서 몽유도원도와 시서화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곳이니까요, 한 번쯤 방문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앵커]
원본이 국내에 있지 않다는 게 무척 아쉽지만 알려주신 무계원에 가서 아쉬움을 달래봐야겠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사이언스 김기봉 (kgb@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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