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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레드카펫] 한 여인의 남자이고 싶었던 영웅이자 황제 '나폴레옹'

2023년 12월 08일 오전 09:00
■ 양훼영 / 과학뉴스팀 기자

[앵커]
한 주의 마지막인 매주 금요일, 영화 속 과학을 찾아보는 시간입니다. '사이언스 레드카펫' 오늘도 양훼영 기자와 함께하겠습니다.

[기자]
'사이언스 레드카펫' 양훼영 입니다. 오늘 만나 볼 작품은 영화 '나폴레옹'입니다. 에일리언, 글래디에이터, 마션 등을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은 평소 '아직 만들지 못한 영화'로 늘 나폴레옹을 꼽았다고 하는데요. 드디어 원하는 영화를 만들게 된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은 어떤 매력을 가졌을까요, 키워드와 함께 영화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인간 나폴레옹'입니다. 영웅이냐, 전쟁광이냐. 나폴레옹을 두고
늘 나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번 영화 '나폴레옹'은 군인이나 정치인이 아닌 인간 나폴레옹에 집중해 그의 일대기를 그려냅니다. 하급 지휘관이었던 나폴레옹은 툴롱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자신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경고하건대]
[난 2인자가 될 생각은 없소]

[기자]
한 사교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조제핀에게 반한 나폴레옹

[이름이?]
[나폴레옹]
[내 인생의 향방이 방금 바뀐 건가요?]

[기자]
열렬한 구애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몇 번의 전투를 거치며 승승장구한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되고, 이후 스스로 황제에 자리에 올라섭니다.

[자네가 왕좌에 오르시게]
[난 진흙 속에서 왕관을 찾았으며]
[내 머리에 쓸 것이다]

[기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위세는 유럽 대륙을 뒤흔들고, 군사 전략가다운 작전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큰 승리를 만들어냅니다.

[장군님 발각됐습니다]
[기다려]
[빙판이다]
[속임수야]
[후퇴]

[기자]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지만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여인 조제핀 앞에서는 다시 나약한 한 남자가 되고 마는데요.

[훌륭해지고 싶어?]
[당신은 나 없인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

[기자]
영화는 나폴레옹이 전쟁 영웅에서 시작해 황제가 되고, 유배지로 쫓겨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의 시간을 그려냈습니다.

[난 실수를 하면 그 즉시 인정한다]
[실수하지 않을 뿐]

[기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이지만, 영화 나폴레옹은 영국인 감독이 연출하고 미국과 영국 배우가 출연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영화 나폴레옹은
지난달 14일 프랑스 파리, 15일 영국 런던에서 시사회가 열렸는데, 두 나라에서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스콧 감독이 기병대의 돌격 장면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면서 별점을 만점을 줬습니다. 더타임스 역시 별 4개를, 영국의 영화잡지 엠파이어는 "나폴레옹에 대한 스콧의 재밌고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프랑스의 주간지 르 카나르 앙셰네는 "영국인 리들리 스콧의 역사적 복수"라고 평가했고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나폴레옹의 전기 작가는 "매우 반프랑스적이고 친영국적인 시각에서 재구성됐다"고 비판했습니다. 무엇보다 부정확한 고증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는데요.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식을 나폴레옹이 목격한 점이나 이집트 원정에서 피라미드에 대포를 쏘는 장면은 모두 허구라는 거죠. 아무래도 영화가 군인이나 황제 나폴레옹이 아닌 인간 나폴레옹, 특히 조제핀과의 관계에 집중한 점이 이런 엇갈린 평가로 나타난 건데요. 두 번째 키워드와 함께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조제핀의 남자'입니다. 이 영화 속 나폴레옹은 평생을 걸쳐 조제핀을 사랑하는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볼 수 있는데요. 리들리 스콧 감독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에 끌리는 이유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나폴레옹

[하지만 내 업적 때문에]
[우리 사이가 멀어진 것 같군]
[당신의 나폴레옹이]

[기자]
나폴레옹은 수만 통이 넘는 편지를 조제핀에게 보냈는데, 영화에서도 조제핀을 향한 나폴레옹의 절절한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바네사 커비 / 조제핀 역
[편지를 보면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어요]
바네사 커비 / 조제핀 역
[정말 매력적이죠]
[전투에 나간 군사 독재자가 텐트에 들어가서 시를 쓰다니요]

[기자]
전형적인 위인 속 모습이 아닌 인간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건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입니다.

바네사 커비 / 조제핀 역
[조제핀은 특별한 존재였어요]
[정말 놀랍고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그 역할을 맡게 돼서 매우 영광이었습니다]

[기자]
이 영화의 또 다른 백미, 바로 압도적이면서도 실감 나는 전투 장면입니다. 나폴레옹은 전쟁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전쟁에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전쟁 장면이 영화에 모두 등장합니다. 특히, 꽁꽁 언 호숫가로 적을 유인한 뒤 대포를 퍼부어 수장시키는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압권인데, 현장에서 스콧 감독은 마치 지휘관처럼 병력 이동을 지시하며 촬영했다고 합니다.

리들리 스콧 / 감독
전투 영화를 제작할 때는 촬영 규모가 엄청납니다.
저는 모든 장면을 한 번에 찍고 싶었어요.
현장에 300명의 인원과 말 100마리, 카메라 11대가 있었습니다. 실제 상황을 재현한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앵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삶을 그린 영화 '나폴레옹'을 만나봤는데요. 이 영화에는 어떤 과학이 숨어있을지 양훼영 기자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저는 사실 나폴레옹 이름을 들으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와
'내 키가 땅에서부터 재면 가장 작으나 하늘에서부터 재면 가장 크다'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잖아요, 이게 사실인가요?

[기자]
네, 그런데 두 명언 모두 명확하게 보자면 틀린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에서 사전이라는 단어는 해석상에 덧붙여진 단어라고 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한 말은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식 단어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또, 키에 관해서는 나폴레옹이 단신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프랑스 남자 평균보다 더 높았던 건데 이유가 당시 수치가 달랐기 때문이거든요. 나폴레옹의 공식적으로 키가 적혀있는 영국 부검소견서에 적힌 5.2ft(피트)인데요. 문제는 이 피트를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피트라는 단위가 성인 발, 성인 남자의 발 길이를 피트라고 보고 있고, 이 단위가 사실은 발 크기가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몇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그 당시에는 조금 달랐던 거예요. 그래서 영국에서 1피트가 30.48cm, 1인치가 2.54cm이고, 프랑스에서 1피트는 32.48cm, 1인치는 2.7cm였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키는 5.2ft로 적었을 때 영국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단위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키를 지금으로 계산하면 157.4cm로 계산을 한 겁니다. 그러면 좀 일반적인 평균보다 당연히 작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프랑스 단위로 계산하면 167.8cm가 나옵니다. 무려 10.1cm가 줄어든 건데, 실제로 당시 프랑스 남자 표준키가 164cm 정도였다고 하니, 나폴레옹은 오히려 큰 편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후대에 본인의 키가 작게 알려질 걸 알았던 건지 나폴레옹은 당시에도 표준단위에 대한 관심이 많아 미터법을 제정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군대에서 총알의 규격이 너무 달라 아무래도 보급할 때 전쟁에서 불편한 일이 많아서 총알의 크기를 규격화하는 일도 실제로 나폴레옹이 진행했다고 합니다.

[앵커]
나폴레옹 하면 키 작은 영웅을 떠올렸는데, 조금은 억울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또 나폴레옹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잖아요, 이게 과학적인 전술이 특징이었다고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포병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은 대포의 체계적인 운용을 통해 화력을 극대화 시켜서 전쟁에서 같은 대포여도 효과를 크게 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당시 프랑스군은 포병 개혁을 추진했는데, 우선 포신과 구경의 크기를 줄여 포병대의 기동성을 높였고요. 포탄의 크기 역시 12, 8, 4파운드로 무게를 통일해서 발사를 할 때 원하는 포탄을 골라서 발사속도를 단축 시키고 효과도 높였다고 하고요, 이런 기본적인 프랑스군의 포병 개혁에 더해져서 나폴레옹의 감각적인 전술적 지휘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다고 하는데요. 특히나 나폴레옹은 전투 전 전장의 지형과 상황에 따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뒤 적의 공격을 견제할 땐 횡대로, 적의 취약 부분을 공격할 때는 종대로 배치하는 혼합형 전술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굉장히 전투에 효과를 높였다고 합니다.

[앵커]
과학적 지식까지 갖춘 군사적 전략가다, 볼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전쟁을 워낙 많이 했으니까 나름의 노하우도 많았을 것 같은데, 식품 보관법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면서요?

[기자]
네, 맞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른바 통조림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데요. 정확히는 통조림의 기원인 '병조림'이 나폴레옹 덕분에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나폴레옹이 수많은 전투에서 병조림을 가져갔기 때문에 식량 보급을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 할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평소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전쟁에 대한 과학적인 지원이나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프랑스의 최고 과학기술자들을 한데 모아 '프랑스 산업 장려협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상금을 걸어서 출정 기간이 길어질수록 문제가 되는 식품의 장기보관 방법을 공모했습니다. 이때 발명가 니폴라 아페르가 '병 속의 식량'이라는 병조림을 개발해 우승 상금을 받았는데요. 샴페인 병에 양배추나 브로콜리 등을 넣고 코르크 마개로 밀봉한 뒤 끓는 물에 넣어 병째로 가열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방부제를 넣지 않아도 안이 진공상태가 되면서 완벽한 밀봉이 되기 때문에 식품을 3주 이상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었고 덕분에 병사들의 식량 배급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조림에도 단점은 있었는데 병 자체가 무겁고 깨지기 쉽고 코르크 마개를 밀봉할 때 양초를 이용해서 밀봉을 했는데, 양초가 녹아들면서 음식 안으로 들어가서 오히려 음식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병조림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영국의 주석 기술자인 피터 듀란드가 양철 깡통을 이용해 음식을 보관하게 된 것이 바로 지금의 통조림인 겁니다.

[앵커]
정말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거 같은데요. 그 마지막 전투인 러시아 원정에서는 크게 진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고요?

[기자]
맞습니다. 나폴레옹이 처음 러시아 원정을 떠날 때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기 전에 전쟁에서 이기고 다시 돌아오겠다 이 계획을 세우고 갔는데,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급로도 모두 막히고 그렇게 되면서 모스크바에 갇히게 됩니다. 문제는 1812년 그해 겨울은 엘니뇨가 발달했던 시기였다는 건데요. 그래서 겨울이 굉장히 다른 때보다 추웠습니다. 영하 38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나폴레옹의 군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죠. 그런데 여기에 과학적 이유가 있다는 게 뭐냐면요, 군복에는 달린 은색 단추를 달았었는데 이 은색 단추는 주석으로 만들었는데, 주석은 온도가 영하 30~40도로 떨어지면 급속도로 부식되면서 회색 가루가 되는 '주석 병'이라는 특성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단추, 외투, 모든 주석에 관련된 것들이 너무 추워지니까 다 부서져서 외투들이 벌어지게 되고 찬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너무 춥다 보니까 옷깃을 자꾸 여미게 되면 총을 잡을 정신이 없었고, 전투에 집중할 수 없어서 결국에는 러시아 원정 때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앵커]
나폴레옹에 대해 몰랐던 점을 많이 알게 됐는데요. 나폴레옹의 운명에 과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양훼영 기자와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사이언스 양훼영 (hwe@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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