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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in Art] 사람들의 마음에 '별밤'을 남기고 떠난 반 고흐

2023년 02월 24일 오전 09:00
■ 박수경 / 아트디렉터

[앵커]
불우한 환경에서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손꼽히는 화가,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기고 떠난 빈센트 반 고흐인데요. 선명하면서도 어두운 명암의 색채로 강렬함을 추구한 빈센트 반 고흐는 불멸의 천재 화가로 평가되지만, 살아생전엔 단 한 점의 작품만이 팔려 극심한 가난과 정신질환에 시달렸죠.

오늘 '사이언스 in Art'에서는 '빈 센트 반고흐'를 돌아보겠습니다.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합니다. 어서 오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오늘은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알아볼 텐데요. 고흐 하면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작품을 빼놓을 수가 없잖아요. 일단 고흐에 대해서 듣기 전에 이 작품에 대해서 알려주시죠?

[인터뷰]
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죠. 고흐가 평소에 좋아하는 밤하늘을 소재로 그린 명작인데요. 캄캄한 밤하늘을 수놓은 달과 별을 거칠고 역동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 고흐는 자신의 동생인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늘 아침,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창문을 통해 아주 큰 샛별뿐인 시골을 바라보았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이때 이 창문은 고흐가 지내던 생레미의 정신병원이자 요양원의 창문을 말합니다.

고흐는 절친했던 친구이자 화가였던 고갱과 다투고 나서, 자신의 귀를 자른 뒤에 이 병원에서 지내게 되는데요. 병실에서 바라본 밤의 풍경이 고흐의 눈에는 유독 다채롭고 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작품 속에 굉장히 힘있게 일렁이는 파도처럼 그려진 하늘과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달빛과 별빛이 눈에 들어오고요. 특히 좌측에 크게 그려진 검은 산처럼 보이는 저 형태는 사실 산이 아니라 사이프러스라는 나무입니다. 거칠게 타오르듯 그려진 사이프러스와 함께 작품 하단에는 생레미의 마을이 그려져 있는데요. 그 중심에 네덜란드 분위기가 물씬 나는 교회 첨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작품 속 마을은 실제 생긴 것과 똑같이 그려진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고흐의 상상이 결합되어 그려졌는데요. 병원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고흐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던 아를을 그리워할 때 그려진 작품입니다.

[앵커]
저는 나무가 아니라 사실 성인 줄 알았는데, 나무였군요. 이 사이프러스 나무를 고흐가 유독 좋아해서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고요?

[인터뷰]
네, 맞습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프랑스 남쪽의 프로방스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요. 고흐는 평소에 사이프러스를 좋아해서, 이 나무를 소재로 고흐의 또 다른 명작인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사이프러스는 전통적으로 죽음과 슬픔, 애도 같은 것들을 상징하기도 하는데요. 방금 함께 본 '별이 빛나는 밤' 외에 다른 작품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890년에 그려진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이 있는 길'이라는 작품과 1889년에 그려진 '사이프러스들', '두 여인과 사이프러스나무' 등이 있습니다.

이 작품들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용솟음치듯 강렬하고 인상적이게 그려졌다는 점이 있어서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앵커]
가장 유명한 작품과 또 사이프러스 나무에 얽혀있는 얘기까지 들어봤는데 그렇다면 이제 빈센트 반 고흐가 누구인지 본격적으로 설명해주시죠.

[인터뷰]
네덜란드 출신의 빈센트 반 고흐는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이면서 대중에게 굉장히 잘 알려진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고흐는 한때 성직자를 꿈꾸기도 했는데요. 1869년에 한 화랑에서 일을 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또 워낙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예술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됩니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작품 아마 많이 아실 텐데요. 그 밀레처럼 노동 층을 주로 작품에 담는 작가가 되기로 합니다. 초기에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작품처럼, 노동자들이 일을 하거나 휴식을 즐기는 일상적인 모습을 담았는데요. 이후에 파리에서 인상파를 마주하게 되면서 작품의 주요 소재가 바뀌게 됩니다.

이 시기에 고흐는 작업에 대한 고민도 많고 심리적으로 불안했지만, 고흐의 작가로서의 인생을 지지하는 테오와 꾸준하게 소통하면서 열심히 정진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약 200여 점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인상파 작가들과 교류하다가 프랑스의 아를이라는 지역으로 향하게 되는데요. 이 아를에서 한층 더 작업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찾게 됩니다.

특히 아를에서 함께 지내면서 교류할 다른 작가들을 찾던 고흐는, 평소 알고 지내던 고갱을 부르게 되는데요. 서로 스타일이 너무 달랐던 그는 크게 다투게 되고, 이 여파로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외에도 잦은 기행으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내지만, 작업은 계속하게 되고요.

이때 '별이 빛나는 밤' 등의 명작들이 나오게 됩니다. 1890년에 파리 근교의 한 지역에서 머물다가 들판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게 되는데요, 이 총상에 대해서는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에 대해 추측이 많습니다만 그로부터 이틀 후 아끼던 동생 테오의 곁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앵커]
굉장히 안타까운 이야기인데요. 고갱과 절친한 사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이유로 다퉜길래 귀까지 자르게 된 걸까요?

[인터뷰]
아무래도 고흐가 각별하게 생각했던 고갱과 성격과 화풍의 차이 등으로 자주 다투게 되고요. 화가 난 고흐가 고갱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데, 고갱은 결국 작업실을 떠나게 됩니다. 일단 둘이 함께 지내다 보니까 서로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요. 고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했다면, 고갱은 좀 더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쪽이었습니다.

일례로 자주 가던 카페 주인의 초상화를 고흐와 고갱이 각자 그리게 되는데, 이때 너무 다른 그림이 나오거든요. 이처럼 둘은 너무 달랐습니다. 다툼이 계속되다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요. 이후에 이 귀를 자신이 종종 만나던 매춘부에게 가져가 보여줬는데, 이 여성이 놀라서 경찰에 신고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앵커]
자른 것도 기행인데 이걸 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까지 하고 참 기행이 많았던 작가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리고 귀가 잘린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죠?

[인터뷰]
네, 맞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1889년 1월에 '자화상'을 그리게 되는데요. 고흐가 살면서 총 36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중에서 단 2점만이 귀에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이라는 작품입니다. 옷차림은 똑같지만, 배경이 다르고, 한 작품은 파이프를 물고 있죠. 작품 속에서는 오른쪽 귀에 붕대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왼쪽 귀를 자른 것으로 거울에 비친 듯 좌우가 바뀌어서 그려진 겁니다.

두 작품의 얼굴 생김새가 조금 다르긴 한데요 표정은 둘 다 밝아 보이지 않죠. 무력한 표정에서 고흐의 불안한 심리가 드러나는데요. 사는 동안 우울증과 조울증, 강박증 같은 정신질환들을 앓았고 납중독까지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다가 납 성분이 들어있는 안료를 먹기도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귀를 자르던 날에 고흐가 굉장히 만취해서 당시 일을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이후에 참 힘든 시간을 보냈을 텐데요.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는 건 기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힘든 시간에도 꾸준히 자화상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살아생전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고흐는 사는 내내 누구보다도 예술에 진심이었던 겁니다.

[앵커]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고흐에게 큰 힘이 되어준 게 동생 테오라고 들었는데요. 둘 사이가 얼마나 각별했을까요?

[인터뷰]
아마 예술계에서 이 정도로 우애 깊은 형제는 없을 것 같은데요. 살아생전에 제대로 작품을 팔아보지 못했던 고흐에게 평생 동안 동생 테오는 큰 버팀목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테오는 자신이 번 돈의 일부를 꾸준히 형에게 보내고 애정 어린 편지를 주고받으며, 심리적으로 불안하지만, 누구보다 잠재력 있는 고흐의 그야말로 멘탈 관리를 해줬다고 볼 수 있는데요.

고흐가 계속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작품 수가 많아졌는데요, 작품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든가 고흐의 치료비, 생활비까지 지원해주게 됩니다. 물론 고흐 또한 이런 동생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아직도 고흐 인생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고요, 이 둘의 끈끈한 우애 또한 아직도 회자 되고 있습니다.

[앵커]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역설적으로 사후에 천재로 인정받는 작가 고흐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앞으로 고흐의 작품을 보면 오늘 말씀해주신 이야기들이 많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사이언스 in 아트' 박수경 아트디렉터와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YTN 사이언스 김기봉 (kgb@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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